ICD-11에서 ‘연극성 인격장애’라는 별도 유형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임상적 어려움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니에요. DSM-5-TR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현재 MSD Manual Professional은 여전히 연극성 인격장애(Histrionic Personality Disorder)를 독립된 범주로 다룹니다. 반면 세계보건기구(WHO)의 ICD-11은 인격장애를 여러 유형 이름으로 나누기보다, 먼저 인격 기능의 어려움이 있는지와 그 심각도를 평가하고 두드러진 성격 특성을 추가로 기술하는 방식으로 바꿨어요.
따라서 “DSM에는 있는데 ICD-11에는 없으니 오진이었다”거나 “ICD-11이 연극성 인격장애를 폐지했다”는 식의 해석은 지나치게 단순해요. 두 분류체계가 같은 사람을 바라보는 질문의 순서를 다르게 설계한 것입니다. 이 글은 진단 기준을 복사해 자가진단표를 만들기보다, DSM-5-TR의 범주형 진단과 ICD-11의 심각도·특성 중심 분류가 어디에서 갈라지는지, 옛 진단명을 새 체계에 일대일로 옮기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합니다.
DSM-5-TR은 연극성 인격장애라는 범주를 유지해요

미국 정신의학계에서 널리 쓰는 DSM-5-TR 체계는 여러 인격장애를 이름이 있는 범주로 구분합니다. MSD Manual Professional의 2026년 1월 갱신 설명도 연극성 인격장애를 과도한 감정 표현과 관심 추구가 여러 상황에서 오래 이어지는 패턴으로 요약하고 있어요. 중요한 점은 화려한 옷차림이나 큰 목소리 같은 겉모습 하나가 진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진단은 패턴의 지속성, 여러 생활영역에서의 범위, 관계와 기능에 미치는 영향, 다른 설명 가능성을 함께 평가하는 과정이에요.
범주형 체계의 장점은 이름이 익숙하고 의사소통이 빠르다는 데 있어요. 연구 논문이나 진료기록에서 ‘연극성 인격장애’라고 쓰면 대략 어떤 임상 개념을 가리키는지 공유하기 쉽습니다. 기존 연구가 오랫동안 같은 이름을 사용해 왔기 때문에 과거 자료와 비교하기도 편하고요. 하지만 같은 진단명을 받은 사람끼리도 실제 어려움의 강도와 특성 조합은 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인관계에서 관심을 잃는 상황에 특히 민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감정 표현이나 충동적인 선택이 더 큰 문제일 수 있어요.
이 차이를 놓치면 진단명이 사람 전체를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Narci의 기존 글인 표현이 큰 성격과 연극성 인격장애를 구분하는 기준에서도 외향성이나 감정 표현 자체가 병이라는 뜻은 아니라고 설명했어요. 이번 글에서는 그보다 한 단계 뒤로 가서, 왜 국제질병분류에서는 이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는지를 보는 거예요.
DSM과 ICD를 비교할 때도 어느 한쪽이 ‘진짜’이고 다른 쪽이 틀렸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체계는 임상가가 정보를 정리하고 의사소통하는 도구이며, 개정 과정에서 서로 다른 문제를 해결하려고 설계를 바꿀 수 있어요. 이름의 존재 여부만으로 개인의 상태를 판단하면 분류체계의 목적보다 라벨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ICD-10에서 ICD-11로 바뀐 것은 이름 하나가 아니라 분류 구조예요

WHO의 이전 체계인 ICD-10에는 F60.4 ‘Histrionic personality disorder’가 별도 항목으로 있었어요. 그래서 ICD-10과 DSM의 오래된 자료를 읽다 보면 연극성 인격장애가 각각의 목록 안에서 하나의 유형처럼 등장합니다. ICD-11에서는 이런 여러 유형의 목록을 대부분 유지하지 않고, 인격장애라는 큰 진단 안에서 심각도와 특성 영역을 기술하도록 방향을 바꿨어요.
WHO는 2024년 3월 ICD-11 임상 진단 지침(CDDR)을 공개하면서 인격장애를 포함한 정신·행동·신경발달 질환의 임상적 기술과 진단 지침을 새 체계에 맞춰 제시했습니다. 인격장애 부분의 변화는 단순히 ‘연극성’이라는 단어를 목록에서 삭제한 사건이 아니에요. 편집성, 조현성, 연극성, 의존성처럼 익숙했던 여러 유형을 각각 별도의 상자로 놓는 대신, 한 사람이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기능이 얼마나 손상되어 있는지부터 평가하도록 구조를 바꾼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흔한 오해가 생겨요. 검색창에서 ICD-11과 ‘histrionic personality disorder’를 함께 찾았는데 독립 코드가 보이지 않으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병인가?”라고 생각하기 쉽죠. 실제 의미는 다릅니다. ICD-11은 그 사람에게 나타나는 어려움을 기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인격 기능의 손상과 특성 조합으로 기록하는 쪽을 택했어요. 오래된 유형명이 사라진 것과 임상 현상이 사라진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반대로 과거 ICD-10의 F60.4 기록을 ICD-11 문서에서 같은 이름의 코드로 찾지 못한다고 해서 과거 기록이 자동으로 무효가 되는 것도 아니에요. 진단체계가 바뀔 때에는 당시 사용한 체계와 시점을 함께 봐야 합니다. 2015년 기록을 2026년 기준 명칭만으로 다시 읽으면, 분류 방식이 바뀐 사실과 실제 임상 변화가 섞일 수 있어요.
ICD-11은 먼저 인격 기능의 어려움과 심각도를 평가해요

ICD-11의 인격장애 모델을 이해하려면 ‘어떤 유형인가?’보다 ‘얼마나 넓고 심각한 어려움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떠올리는 편이 좋아요. Bach와 동료들이 2022년에 정리한 ICD-11 인격장애 분류 리뷰는 새 체계가 인격장애의 존재 여부를 판단한 뒤 심각도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필요한 경우 두드러진 성격 특성 영역을 추가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방식에서는 진단명 하나가 모든 정보를 대신하지 않아요.
심각도는 단순히 증상이 몇 개냐를 세는 점수가 아닙니다. 자기 정체감과 자기가치가 얼마나 안정적인지, 목표를 세우고 유지하는 능력은 어떤지,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그 문제가 일과 가족·사회생활을 어느 정도 방해하는지처럼 기능을 폭넓게 살펴요. 같은 종류의 대인관계 문제가 있어도 생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면 임상적 의미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ICD-11 인격장애 분류가 유형보다 심각도와 성격 특성을 먼저 보는 이유에서 더 자세히 다룬 적이 있어요. 연극성 인격장애를 이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심을 받지 못할 때 불편해하거나 감정 표현이 강하다는 특징만 떼어 놓고 보는 대신, 그 패턴이 자기 기능과 대인 기능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해요.
ICD-11에는 진단 문턱 아래의 인격 어려움을 기술할 수 있는 선택지도 있습니다. 이것은 ‘가벼운 인격장애’라는 뜻으로 단순 변환할 수 없고, 정신질환 진단과 동일한 지위를 갖는 것도 아니에요. 이런 층위를 둔 이유 중 하나는 사람의 성격적 어려움이 정상과 장애 사이에서 칼로 자르듯 두 집단으로만 나뉘지 않는다는 점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모델을 온라인 자가진단에 이용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아요. 심각도 판단에는 시간축과 다양한 생활영역, 문화적 맥락, 다른 정신건강 상태의 영향까지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관계에서 자주 서운하니까 경도”처럼 스스로 등급을 붙이는 방식은 ICD-11이 의도한 임상 평가와 거리가 멉니다.
특성 영역은 옛 진단명을 일대일로 번역하는 코드가 아니에요

ICD-11은 인격장애가 확인된 뒤 필요에 따라 부정적 정서성, 거리두기, 반사회성, 탈억제, 강박성 같은 특성 영역을 기술할 수 있게 합니다. 여기서 조심할 부분이 있어요. 옛 연극성 인격장애를 특정 특성 하나로 바꾸면 된다는 공식 변환표는 없습니다. “연극성 = 탈억제”처럼 한 단어로 번역하면 기존 진단이 담고 있던 서로 다른 특징과 개인차를 놓칠 수 있어요.
2023년 Simon과 동료들이 발표한 ‘Cross-walking personality disorder types to ICD-11 trait domains’ 연구는 기존 인격장애 유형과 ICD-11 특성 영역 사이의 관계를 경험적으로 비교했습니다. 이런 연구가 필요한 이유 자체가 단순한 일대일 변환이 어렵기 때문이에요. 기존 유형은 여러 성격 특징을 한 범주에 묶어 놓았고, 새 특성 모델은 그 묶음을 다시 분해해 기술하려고 합니다. 연구에서 나타난 평균적 연관성을 한 사람의 공식 변환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관심을 적극적으로 끌려는 행동은 상황에 따라 탈억제와 관련된 특징처럼 보일 수 있지만, 거절에 대한 민감성이나 정서 반응은 다른 특성 영역과 연결될 수 있어요. 누군가가 사교적이고 표현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느 특성 영역이 높다고 결정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 평가는 행동이 왜 반복되는지, 다른 상황에서도 같은지, 기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함께 봅니다.
이 때문에 과거 진단명과 현재 ICD-11 표현을 나란히 볼 때는 ‘정답 번역’을 찾기보다 무엇을 측정한 기록인지 확인하는 편이 낫습니다. 예전 기록이 범주형 DSM 또는 ICD-10 진단인지, 새 기록이 ICD-11의 심각도와 특성 기술인지, 연구 논문이 자기보고 설문을 사용했는지 구조화된 임상 면담을 사용했는지에 따라 문장의 의미가 달라져요.
경계성 패턴은 ICD-11에서 별도의 선택적 패턴 한정자로 남아 있는데, 이것도 다른 옛 유형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유지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임상 연속성과 치료 연구의 축적 같은 현실적인 이유를 고려한 예외적 요소로 이해하는 편이 맞아요. 따라서 “경계성은 남았으니 더 진짜이고 연극성은 사라졌으니 덜 진짜다”라는 서열을 만들 근거도 없습니다.
왜 유형 목록에서 차원적 모델로 옮겼는지 연구가 말하는 것

범주형 인격장애 진단은 오랫동안 임상 의사소통에 도움을 줬지만, 연구에서는 몇 가지 반복되는 문제가 지적돼 왔어요. 한 사람이 여러 인격장애 기준을 동시에 충족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같은 진단명을 받은 사람끼리도 실제 특징 조합이 상당히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진단 문턱 바로 아래에 있는 사람의 기능 손상이 작다고 단정할 수도 없어요. 이런 문제는 유형 이름만으로 개인의 어려움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는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Bach 등의 ICD-11 리뷰는 새 분류가 심각도와 특성 영역을 중심으로 이러한 문제를 줄이려는 시도라고 설명합니다. 심각도가 치료 필요성과 기능 손상을 정리하는 중심축이 되고, 특성 영역은 그 어려움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덧붙여요. 이것은 모든 연구가 차원적 모델의 우월성을 확정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새 체계 역시 임상가 교육, 평가의 일관성, 문화권에 따른 적용, 기존 연구와의 연결 같은 과제를 계속 검증해야 합니다.
또 분류체계의 변화가 실제 사람의 성격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은 아니에요. 진단 매뉴얼은 관찰된 문제를 어떻게 정리하고 이름 붙일지 정하는 공통 언어에 가깝습니다. 분류가 바뀌면 같은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기술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과거 관계 경험이나 현재의 기능 손상이 갑자기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ICD-11에서 빠졌다”는 사실만으로 치료나 상담이 필요 없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반대로 DSM의 이름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인터넷 행동 목록 몇 개를 근거로 누군가에게 진단명을 붙여서도 안 되고요. 실제로 도움이 필요한지는 지속되는 어려움의 범위와 기능 영향, 다른 원인의 가능성을 전문 평가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분류체계 연구는 집단 수준의 자료라는 한계도 있어요. 서로 다른 국가와 언어, 임상 환경에서 같은 모델이 동일하게 작동하는지 계속 확인해야 하고, 기존 진단명을 새 특성 점수에 연결한 연구 결과도 사용한 표본과 측정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 연구의 평균값을 개인에게 그대로 적용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서로 다른 진단 체계를 읽을 때 무엇을 확인해야 하나

의무기록이나 논문에서 연극성 인격장애라는 표현을 만났다면 먼저 자료가 어떤 분류체계를 사용했는지 확인해 보세요. DSM-5-TR을 바탕으로 한 설명인지, ICD-10 시기의 코드인지, ICD-11을 적용한 최근 기록인지가 출발점입니다. 발행 연도만 보는 것보다 실제로 사용한 진단체계와 판본을 확인해야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읽는 실수를 줄일 수 있어요.
둘째로 진단명과 실제 관찰 내용을 분리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연극성 인격장애”라는 라벨이 적혀 있더라도 그 사람이 어떤 관계·자기 기능의 어려움을 보였는지, 얼마나 오래 지속됐는지, 어떤 환경에서 문제가 커졌는지가 더 구체적인 정보예요. ICD-11 기록이라면 심각도와 특성 한정자가 어떤 근거로 붙었는지 봐야 하고요.
셋째, 서로 다른 체계를 기계적으로 환산하지 마세요. 연구 목적의 cross-walk는 집단 수준에서 이전 유형과 새 특성 영역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개인의 진단을 자동 변환하는 계산기가 아닙니다. 과거 진단을 현재 기준으로 다시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당시 기록과 현재 기능을 함께 검토하는 임상적 재평가가 필요합니다.
넷째,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독자라면 분류체계보다 관찰 가능한 행동을 우선해도 됩니다. 누군가의 말투가 과장되어 보이는지보다 반복적으로 사생활을 공개하는지, 경계를 무시하는지, 갈등 뒤 조정이 가능한지처럼 실제 행동이 관계 결정에 더 직접적인 정보예요. 진단 여부와 무관하게 통제·위협·반복적인 모욕이 있다면 그 행동을 기준으로 안전과 거리를 판단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평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내가 연극성인가?”라는 체크리스트보다 시간축을 준비하는 편이 낫습니다. 비슷한 관계 문제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관계가 바뀌어도 반복되는지, 일·학업·가족생활에서 어떤 기능 손상이 있는지, 반대로 문제가 잘 나타나지 않는 상황은 무엇인지 정리하면 전문가가 더 많은 정보를 바탕으로 평가할 수 있어요.
이름이 바뀌거나 사라져 보이는 순간에는 병명 자체에 시선이 쏠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DSM-5-TR과 ICD-11의 차이는 “어느 병이 진짜냐”를 가르는 싸움이 아니라, 복잡한 인격 기능의 어려움을 어떻게 기록할지에 대한 서로 다른 설계예요. 연극성 인격장애라는 DSM 범주를 이해하는 것과 ICD-11의 심각도·특성 모델을 이해하는 일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참고한 자료
- MSD Manual Professional — Histrionic Personality Disorder (HPD). 2026년 1월 갱신 자료, 최종 확인 2026-09-12.
- MSD Manual Professional — Overview of Personality Disorders. 2026년 1월 갱신 자료, 최종 확인 2026-09-12.
- WHO — ICD-11 Clinical Descriptions and Diagnostic Requirements 공개 안내. 2024-03-08 발행, 최종 확인 2026-09-12.
- WHO ICD-10 — F60.4 Histrionic personality disorder. ICD-10 브라우저 자료, 최종 확인 2026-09-12.
- Bach B et al. The ICD-11 classification of personality disorders. 2022, 최종 확인 2026-09-12.
- Simon L et al. Cross-walking personality disorder types to ICD-11 trait domains. 2023, 최종 확인 2026-09-12.
이 글은 일반적인 정보 제공을 위한 자료이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진단과 치료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온라인 글이나 몇 가지 행동만으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진단하지 마세요. 생활과 관계의 어려움이 오래 이어진다면 자격을 갖춘 정신건강 전문가에게 전체 상황을 평가받는 것이 좋습니다.